챔피언스리그 데뷔전에서 90분을 뛰었고 팀은 세 골을 내줬다. 센터백에게 이보다 불편한 기록은 없다. 클럽 브뤼헤의 이한범은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2-3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스코어만 읽으면 수비 실패다. 그런데 세 실점을 한 장면씩 떼어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골은 미드필드가 비워 준 중앙에서 시작됐고, 다른 한 골은 박스 안 연속 플레이에서 나왔다. 이한범이 가장 직접적으로 걸린 장면은 세 번째 골이었다. 그 장면에서도 센터백의 경합, 수비 간격, 골키퍼의 전진 판단이 동시에 겹쳤다.
이한범을 감싸기 위한 글도, 세 골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글도 아니다.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치른 첫 90분이 정확히 무엇을 보여 줬는지 확인해 보려 한다.
이한범 챔피언스리그 데뷔전 분석 표지
*이한범은 클럽 브뤼헤의 센터백으로 선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다. 시각화: MOM*
공은 브뤼헤가 가졌는데, 기회는 빌라가 만들었다
이 경기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점유율이다. 브뤼헤는 공을 64% 보유했고 608번 패스를 시도해 539번 연결했다. 상대 페널티박스 안 터치도 33회로 빌라의 26회보다 많았다.
그런데 슈팅은 빌라가 21-14로 앞섰고 유효슈팅도 9-7이었다. 기대득점은 더 크게 벌어졌다. 브뤼헤 1.45, 빌라 3.02였다. 브뤼헤가 더 오래 공을 갖고 더 자주 박스에 들어갔지만, 한 번의 공격이 슈팅으로 끝날 확률과 슈팅의 질은 빌라 쪽이 높았다.
클럽 브뤼헤와 아스톤 빌라 경기 지표 비교
*점유·패스 우세와 슈팅 효율이 반대로 움직였다. 자료: StatMuse, Opta Analyst / 시각화: MOM*
이 숫자는 이한범을 포함한 브뤼헤 수비진이 어떤 경기를 치렀는지도 말해 준다. 자기 진영에 내려앉아 슈팅을 걷어 내는 경기가 아니었다. 팀이 높은 위치에서 공을 소유하는 동안 센터백 두 명은 넓은 뒤 공간을 관리해야 했다. 빌라는 그 공간을 노리고 적은 패스로 빠르게 전진했다.
스카이스포츠가 이 경기를 빌라의 ‘역습 청사진’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리그 첫 세 경기에서 유효슈팅 하나에 그쳤던 팀이 브뤼헤 원정에서는 전반에만 세 골을 넣었다. 공격력이 갑자기 살아난 배경에는 브뤼헤가 내준 전환 공간이 있었다.
첫 실점, 센터백보다 먼저 무너진 곳
11분 선제골은 빌라 센터백 파우 토레스에게서 시작됐다. 토레스는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아 브뤼헤 페널티박스 앞까지 거의 제지받지 않고 전진했다. 그가 왼쪽의 존 맥긴에게 공을 내줬고, 맥긴이 첫 터치 슈팅으로 반대편 골문을 갈랐다.
이 장면을 이한범의 일대일 수비 실패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상대 센터백이 중앙을 가로질러 박스 앞까지 전진하는 동안 누가 막았느냐다. 브뤼헤의 1차 압박과 중원 보호가 작동하지 않자 최종 수비선은 공을 든 토레스와 골문 앞 공격수를 동시에 의식해야 했다.
그렇다고 센터백의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최종선이 더 일찍 전진해 토레스의 선택지를 좁힐 수 있었는지, 맥긴을 향한 패스 길을 누가 관리했는지는 영상과 위치 데이터로 더 살펴야 한다. 공개된 경기 리포트만으로 특정 수비수의 위치 오류를 단정할 수는 없다.
브뤼헤는 19분 위고 베틀레센의 골로 곧바로 동점을 만들었다. 얀 비르길리가 빌라의 오른쪽을 돌파해 낮은 공을 건넸고 베틀레센이 마무리했다. 공격할 때는 브뤼헤의 넓은 폭이 효과를 봤다. 문제는 그 기세가 수비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3분 만에 다시 실점, 박스 안에서 한 발씩 늦었다
동점은 3분을 버티지 못했다. 니콜라 잭슨의 백힐을 받은 주앙 고메스가 페널티박스 안에서 방향을 바꾼 뒤 에밀리아노 부엔디아에게 공을 내줬다. 부엔디아는 가까운 거리에서 1-2를 만들었다.
이 장면은 특정 센터백 한 명보다 수비 블록 전체의 대응 속도를 보여 준다. 잭슨의 짧은 연결, 고메스의 턴, 부엔디아의 침투가 이어지는 동안 브뤼헤는 공을 가진 선수에게도, 마지막에 들어오는 선수에게도 충분한 압박을 걸지 못했다.
텍스트 중계와 공개 리포트에는 각 수비수의 마크 대상이 기록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골을 이한범의 책임이라고도, 책임이 없다고도 잘라 말할 근거가 부족하다. 확인 가능한 사실은 빌라가 브뤼헤 박스 안에서 세 번의 빠른 연결을 끊기지 않고 완성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실점은 피할 수 없다. 토레스가 자기 페널티박스 부근에서 긴 공을 보냈고, 잭슨은 이한범과 브랜던 메헬레 사이로 달렸다. 골키퍼 얀 조머는 골문에서 약 40야드 떨어진 곳까지 나왔다. 잭슨이 먼저 공을 건드렸고, 따라붙은 이한범과의 몸싸움에서도 버틴 뒤 빈 골문에 넣었다.
이한범은 회복 경합에서 공격수를 멈추지 못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더 빠른 판단과 더 강한 첫 접촉이 필요하다는 숙제를 받은 장면이다. 여기까지는 분명하다.
다만 이 실점을 오직 센터백의 힘 부족으로만 정리하면 절반만 보게 된다. 토레스가 긴 패스를 올릴 때 공을 압박하지 못했고, 두 센터백 사이에는 잭슨이 출발할 길이 열려 있었다. 조머는 넓은 공간을 대신 지우려다 공을 처리하지 못했다. 스카이 이탈리아 역시 결정적 원인으로 조머의 잘못된 전진을 지적했다.
좋은 수비는 이런 여러 단계 중 하나가 실패해도 다음 단계에서 막는다. 브뤼헤는 긴 패스 압박, 뒷공간 간격, 골키퍼 처리, 이한범의 회복 경합이 연속해서 무너졌다. 이한범은 그 연쇄의 마지막에 있었고, 그래서 장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연쇄 전체를 혼자 만든 것도 아니다.
클럽 브뤼헤와 아스톤 빌라 득점 타임라인
*세 실점은 서로 다른 경로에서 나왔다. 자료: UEFA, The Guardian, Opta Analyst / 시각화: MOM*
후반전이 보여 준 반대 증거
전반 43분에 1-3이 됐지만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브뤼헤는 후반에 빌라를 자기 진영으로 밀어 넣었다. 61분 완비사카의 핸드볼로 얻은 페널티킥을 니콜로 트레솔디가 성공시켰고, 이후 트레솔디의 헤더는 골대를 맞고 골키퍼 스즈키 품에 들어갔다.
브뤼헤는 끝까지 33번의 상대 박스 터치를 쌓았다. 이한범과 메헬레가 뒤에서 공을 돌리며 공격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압박이었다. 동시에 빌라는 역습으로 계속 추가골을 노렸다. 후반 막판 라마르 보가르드의 슈팅은 골라인 앞에서 걷어졌다.
이한범은 90분을 마쳤다. 두 차례 파울이 기록됐지만 경고는 받지 않았다. StatMuse 평점은 6.2, FotMob은 6.6이었다. 평가 방식이 다른 평점을 직접 비교해 선수의 경기력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느 쪽에서도 세 실점의 단독 원인으로 지목될 정도의 극단적인 평가가 나온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감독이 후반 추격전에서도 센터백 조합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신뢰의 선언이라는 뜻은 아니다. 교체 카드와 선수단 사정도 작용한다. 그래도 데뷔 무대에서 한 번의 뒷공간 실점 뒤에도 빌드업과 높은 수비선을 계속 맡았다는 경험 자체는 작지 않다.
실패한 데뷔가 아니라, 수준을 확인한 데뷔
이한범의 챔피언스리그 첫 경기를 성공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다. 팀은 홈에서 세 골을 내줬고, 세 번째 실점에서는 직접적인 회복 경합에 실패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상대의 긴 패스가 나오기 전 몸의 방향을 잡고, 파트너와 간격을 좁히며, 골키퍼의 전진 여부를 더 빨리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3실점한 센터백’ 한 줄로 끝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첫 골은 중원 앞 공간이 열린 데서 시작됐고, 두 번째는 박스 안 연속 대응이 늦었다. 세 번째도 팀의 압박과 수비 간격, 골키퍼 판단이 먼저 흔들린 뒤 이한범의 경합 실패가 이어졌다.
브뤼헤는 64%의 점유율로 경기를 주도하려 했고, 그 대가로 센터백에게 넓은 공간을 맡겼다. 이한범의 첫 시험은 수비 숫자가 많은 편안한 경기가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공격수와 수십 미터를 달려야 하는 경기였다.
결론은 단순하다. 이한범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살아남았다고 만족하기에도 이르다. 빌드업을 이어 가는 능력은 팀이 후반 반격하는 기반이 됐고, 잭슨에게 밀린 43분 장면은 유럽 최상위 무대에서 보완해야 할 기준을 보여 줬다.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의 가치는 무결점에 있지 않다. 어떤 실수가 개인의 것이고, 어떤 문제가 팀 구조에서 시작됐는지 구분할 수 있게 됐다는 데 있다. 이한범의 다음 경기는 바로 그 답을 확인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맞아. 골키퍼가 40야드까지 나왔다는 건 이미 수비 라인이 평소보다 훨씬 넓어진 상태였다는 뜻이라, 마지막 경합만 떼서 보면 판단이 너무 단순해짐. 그래도 그런 상황일수록 센터백이 몸을 먼저 넣어 공격수의 진행을 늦추는 게 중요하고, 이한범은 그 한 박자가 아쉬웠던 장면으로 보임.
맞아, 43분 장면은 앞에서 압박이 끊기고 골키퍼까지 넓게 나온 뒤라 이한범만 떼어 놓고 보면 놓치는 게 많아. 그래도 그 순간 공격수와 몸싸움에서 한 발 밀린 건 본인도 다음 경기에서 제일 먼저 돌아볼 장면일 듯해. 데뷔전 전체가 흔들린 건 아니어도 그 한 장면은 확실히 유럽 무대의 속도를 체감했을 것 같아.